상호작용하는 경험의 디자인

만화를 그리려는 사람에게는 만화가 아니라 드로잉을 먼저 가르쳐 준다. 그것은 그림의 기본이다. 만화는 그 기본에서 가지를 치고 나와 연속적인 이야기와 결합한 매체이고, 그 특징적인 화법(畵法)들 역시 기본에서 발전한 것이다. 처음부터 전형적인 일본식 망가 그림체를 가르쳐준다면, 자신만의 표현법을 가질 수 없다. 결국 자신의 경험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할 수 없게 된다. 글쓰는 법을 가르친답시고 'ㄱ, ㄴ, ㄷ, ...'이 아니라, '가위', '노새', '다리' 같은 단어를 먼저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게임 디자인의 기본은 무엇일까? 게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경험을 표현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상호작용으로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로잉'이나 '글쓰기', '이야기 구성하기'처럼 적당히 짧은 표현은 아직 찾지 못 했다.

이 '상호작용하는 경험의 디자인'은 셀 수 없이 많은 분야에 사용된다. 게임의 사촌이라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설명도 필요없을 것이다. 컴퓨터 이전의 게임들도 역시 그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건축가들도 자신이 지을 건물에 살아갈 사람들이 건물을 통해 겪을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디자인한다. 토론식 교수법을 사용하는 교사들 역시 학생들의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디자인하고, 실천한다. 복지사들도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디자인한다. 국회의원도 국가와 국민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입법'이라는 상호작용하는 경험의 디자인 과정을 수행한다.

게임이, 특히 컴퓨터 게임이 그런 많은 매체들과 다른 점은 그것이 엔터테인먼트, 즐거움을 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과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지만 엔터테인먼트는 아닌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엔터테인먼트 영화와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지만 엔터테인먼트는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 작가영화, 예술영화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이름을 갖다붙여보자면 다큐멘터리 게임, 작가 게임, 예술 게임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게임이란 용어 자체가 이미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띄고 있으므로 적절한 용어라곤 할 수 없다. 조금 이상하지만 인터랙티브 다큐멘터리나 인터랙티브 아트 같은 용어도 괜찮을지 모른다.

어쨌든 용어야 어찌 되든 좋다. 그런데 왜 실제로 그런 것들이 잘 나오지 않을까? 자금이나 인식의 문제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컴퓨터로 디자인하고자 하는 사람을 가르치는 곳은 대부분 게임 디자인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미술을 배우고 싶은데 만화를 가르치는 곳 밖에 없는 셈이다.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디자인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고, 게임을 디자인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만 있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게임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에게도 게임을 디자인하는 법부터 가르치는 것은 빠르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글쓰는 법을 가르친답시고 'ㄱ, ㄴ, ㄷ, ...'이 아니라, '가위', '노새', '다리' 같은 단어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다. 처음 드로잉을 배우며 그것이 세계적인 명화 <모나리자>처럼 찬사를 받는 것을 기대하진 않을 것이다. 최소한 그 드로잉을 액자로 벽에 걸어둘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즉, 드로잉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게임을 디자인한다고 해서 처음 배울 때부터 자기의 디자인이 만드는 경험이 사람들에게 재미있을까 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드로잉으로 사물을 캐치해내는 능력(시각적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처럼, 게임 디자인이 아닌 '상호작용하는 경험의 디자인'을 통해 경험을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먼저 키워야 하는 게 아닐까?

by 퍼플렉싱 | 2008/05/26 19:23 | 게임을 하다 | 트랙백 | 덧글(1)

트랙백 주소 : http://perplexing.egloos.com/tb/173332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연풍 at 2008/05/26 20:54
글이 너무 빽빽해서 눈아파.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